히어로 영화에서 주인공이 술에 취해 개 옆에서 신세 한탄을 한다면 어떻게 느껴지실 것 같습니까? 보통은 "망한 영화" 소리가 나올 법한 설정인데, 저는 예고편을 처음 보는 순간 오히려 "이거다" 싶었습니다. 상처를 감추고 씩씩하게 웃는 히어로에 지쳐 있던 분들이라면, 이 영화가 다르게 느껴질 가능성이 높습니다.
슈퍼맨과 슈퍼걸, 같은 별 출신인데 왜 이렇게 다를까 — 캐릭터 아크
두 캐릭터는 같은 크립톤 출신이지만, 형성 과정 자체가 완전히 다릅니다. 슈퍼맨 칼-엘은 행성 멸망을 기억하지 못한 채 지구에서 사랑을 먹고 자랐습니다. 지구는 그에게 처음부터 '집'이었고, 히어로로서의 정체성은 그 삶의 자연스러운 연장선이었죠.
반면 카라 조엘은 사명을 짊어지고 지구에 왔습니다. 어린 사촌 동생을 돌보라는 역할이요. 그런데 막상 도착해 보니 슈퍼맨은 이미 보호가 필요 없는 존재가 되어 있었습니다. 여기서 캐릭터 아크(Character Arc), 즉 인물이 이야기를 통해 변화해 나가는 내면의 여정이 시작됩니다. 카라는 역할을 잃은 채 크립톤의 기억만 안고 지구에 서 있었던 셈입니다.
이 설정이 흥미로운 이유는, 보통 이런 출발점에서 캐릭터는 빌런으로 가기 마련이라는 점입니다. 트라우마(Trauma), 즉 심리적 외상을 입은 인물이 복수나 분노로 흘러가는 건 장르 문법상 자연스러운 흐름이니까요. 그런데 슈퍼걸은 빌런 대신 방랑을 선택합니다. 23살 생일에 우주를 떠도는 설정이 단순한 연출이 아니라, 자기 기준을 만들 공간을 스스로 찾아 나선 행동이라는 시각도 있는데, 저는 그 해석이 꽤 설득력 있다고 봅니다.
슈퍼맨이 없는 우주에서 카라의 능력은 해결책이 아니라 부담이 됩니다. 이 지점이 이번 영화에서 가장 솔직한 부분이라고 느꼈습니다. 힘이 있다고 해서 항상 세상을 바꿀 수 있는 건 아니라는 것, 오히려 힘이 있기 때문에 더 고통스러울 수 있다는 것.
DC 유니버스가 히어로를 구분하는 방식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 슈퍼맨: 희망의 화신. 지구에서 자란 정체성이 곧 히어로의 뿌리
- 원더우먼: 신화적 존재. 신과 인간 사이의 경계에서 탄생한 정의
- 슈퍼걸: 생존자. 고통을 극복한 것이 아니라 고통을 안고 걸어가는 인물
심리학에서는 이처럼 트라우마를 안고도 삶을 이어가는 능력을 레질리언스(Resilience)라고 부릅니다. 레질리언스란 역경이나 충격적인 사건 앞에서 무너지지 않고 회복하는 정신적 탄력성을 의미합니다. 슈퍼걸의 서사는 바로 이 레질리언스가 어떻게 만들어지는지를 정면으로 다루는 이야기로 읽힙니다. 실제로 미국심리학회(APA)는 레질리언스를 단순한 개인 기질이 아닌, 관계와 경험을 통해 발달하는 능력으로 정의하고 있습니다(출처: 미국심리학회).

로보 캐스팅과 생존자 서사 — 이 영화가 정말 하고 싶은 말
제이슨 모모아의 로보 캐스팅 얘기를 안 할 수가 없습니다. 솔직히 이건 예상 밖이었습니다. 아쿠아맨 시절부터 "저 사람은 로보 해야 한다"는 말이 DC 팬덤에서 꾸준히 나왔는데, 실제로 실현된 겁니다. 제가 직접 예고편을 돌려보면서 느낀 건 싱크로율이라는 단어가 이렇게 딱 맞는 경우가 흔치 않다는 것이었습니다.
로보라는 캐릭터는 DC 코믹스 원작에서 현상금 사냥꾼으로 등장하는 인물입니다. 불멸에 가까운 재생력을 가졌고, 폭력을 규칙으로 삼으며, 돈이 곧 정의라는 가치관을 가진 마초적 캐릭터죠. 일부 만화에서는 저스티스 리그(Justice League), 즉 DC 유니버스 최강의 히어로 연합 전체를 상대하기도 한 인물입니다. 이 캐릭터를 슈퍼걸 옆에 배치한 이유가 분명히 있다고 봅니다.
로보와 슈퍼걸은 공동의 적 클레임을 두고 대립합니다. 힘이 있으면 때려 부수고 잡으면 된다는 로보의 논리 대 선택을 상대방에게 맡기는 슈퍼걸의 방식. 이 대비 구조는 단순한 히어로 대 악당의 충돌이 아닙니다. 도덕적 행위자성(Moral Agency), 즉 힘을 가진 존재가 그 힘을 어떻게, 언제, 왜 사용하는가에 대한 질문입니다. 도덕적 행위자성이란 스스로의 판단과 책임 아래 도덕적 결정을 내리는 능력을 의미합니다. 로보는 결과에만 집중하고, 슈퍼걸은 과정과 관계를 먼저 봅니다.
그리고 소녀 루시의 복수 여정에서 슈퍼걸이 취하는 태도가 이 영화의 핵심 메시지라고 생각합니다. "복수는 나쁜 거야"라고 말하지 않는 히어로. 저는 이 설정을 처음 접했을 때 좀 낯설었습니다. 히어로라면 당연히 정의를 가르쳐야 한다고 생각해 왔으니까요. 그런데 생각해 보면, 상처받은 사람에게 "그래도 복수는 안 돼"라고 말하는 건 그 고통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이 할 수 있는 말입니다.
서사학(Narratology)에서는 이처럼 주인공이 정답을 제시하지 않고 동행하는 서사 구조를 컴패니언 내러티브(Companion Narrative)라고 분류하기도 합니다. 컴패니언 내러티브란 주인공이 안내자나 구원자가 아니라 동반자로서 타인의 여정을 함께 걷는 이야기 구조를 말합니다. 이런 구조가 현대 관객에게 더 강하게 작동하는 이유는, 완벽한 히어로보다 자기 아픔을 아는 동료에게 더 쉽게 감정이입이 되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영화 관객 연구에서도 주인공의 결함이 뚜렷할수록 감정 몰입도가 높아지는 경향이 확인된 바 있습니다(출처: 미국영화예술과학아카데미).
크립토가 슈퍼맨이 아닌 슈퍼걸 곁에 있다는 설정도 이 맥락에서 읽힙니다. 크립토는 크립톤의 마지막 흔적이자, 카라가 무너지지 않도록 묵묵히 곁을 지키는 존재입니다. 잔소리도, 간섭도 없이 그저 함께 있어주는 방식. 어떻게 보면 슈퍼걸 서사에서 가장 이상적인 관계의 형태를 보여주는 캐릭터가 바로 크립토가 아닐까 싶습니다.
2026년 6월 극장에서 이 영화를 확인하기 전까지는, 기대와 우려가 공존하는 게 솔직한 심정입니다. 생존자 서사를 상업 영화 안에서 설득력 있게 풀어내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니까요. 다만, 슈퍼걸이 정의를 외치지 않고 루시 옆에서 함께 걷는 선택을 한다면, 그건 제가 최근 히어로 영화에서 본 것 중 가장 정직한 장면이 될 것 같습니다. DC가 이번만큼은 옳은 방향을 가리키고 있다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