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능력자라면 으레 혼자서 세상을 구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으셨습니까? 영화 하이파이브를 보기 전까지 저도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직접 겪어보니, 이 영화의 초능력자들은 혼자서는 아무것도 못 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리고 그게 오히려 더 마음에 박혔습니다.

평범한 이웃들의 연대, 결핍이 만든 힘
영화 하이파이브는 의문의 장기 기증자로부터 심장, 각막, 폐, 간 등을 이식받은 평범한 사람들이 초능력을 얻으면서 벌어지는 이야기입니다. 할리우드 히어로물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선택받은 자의 각성' 서사와는 결이 다릅니다.
제가 이 영화에서 가장 먼저 주목한 건 캐릭터 구성이었습니다. 표절 의혹을 뒤집어쓴 시나리오 작가, 코인 투자로 인생을 허비하는 청년, 심장 이식 후 과보호하는 아버지 밑에서 숨 막혀하는 딸, 자살 미수 이후 죄책감을 안고 요구르트를 파는 여성. 어느 하나 완벽한 사람이 없습니다. 그때 느낀 건, 이 영화가 히어로물의 외피를 빌려 실은 '상처받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하고 싶다는 거였습니다.
여기서 서사 구조(narrative structure)라는 개념을 잠깐 짚고 넘어가겠습니다. 서사 구조란 이야기가 어떤 순서와 논리로 쌓여 의미를 만들어내는가를 뜻합니다. 하이파이브는 초반부에 각 인물의 결핍과 상처를 차곡차곡 쌓고, 이를 초능력이라는 장치로 외화(外化)하는 방식을 선택합니다. 특히 김선녀(라미란)의 서사가 그 정점에 있습니다. 자신을 구하려다 전신 화상을 입은 소방관의 아내에게 "차라리 자살에 성공했으면 좋겠다"는 폭언을 들으며 무릎 꿇는 장면은 저도 눈을 피하기 어려웠습니다.
그 선녀가 지성의 손을 잡는 순간 각 인물의 문양이 연결되며 치유 능력이 증폭되는 장면, 즉 캐릭터 아크(character arc)가 완성되는 그 순간은 이 영화 전체에서 가장 묵직했습니다. 캐릭터 아크란 인물이 이야기를 통해 내면적으로 변화하고 성장하는 궤적을 의미합니다. 선녀의 아크는 '자격 없는 자의 각성'이라는 점에서, 제가 살면서 무력감에 주저앉았던 어떤 순간들과 겹쳐 보였습니다.
이 영화가 건드린 핵심 포인트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 초능력은 완성된 개인에게 오는 것이 아니라, 서로의 결핍을 연결할 때 완성된다
- 각 인물의 상처(심장병, 표절 의혹, 자살 미수, 시각장애)가 곧 능력의 원천으로 전환된다
- 혈연이 아닌 연대로 구성된 유사 가족(pseudo-family)이 서사의 중심이다
장르 전환이 만든 불협화음, 그 아쉬움
솔직히 이건 예상 밖이었습니다. 전반부의 하이파이브는 요구르트 카 추격전, '구걸(나인걸)' '탱크보이' 같은 엉성한 히어로명, 리코더로 연습하다 동료를 날려버리는 개그 씬까지, B급 감성의 유쾌함이 넘칩니다. 그러다 영춘(신구)이 본격적으로 등장하는 후반부로 넘어가면 분위기가 완전히 달라집니다.
마취 없이 진행되는 장기 강탈, 적출 후 피에 젖은 붕대, 회춘한 교주의 부흥회. 이건 제가 보던 그 영화가 맞나 싶을 정도로 톤이 바뀝니다. 영화에서 장르 전환(genre shift)이란 한 작품 안에서 두 가지 이상의 장르 문법이 교차하는 현상을 말합니다. 의도적으로 활용하면 강렬한 대비 효과를 낼 수 있지만, 속도 조절에 실패하면 관객이 감정 이입의 실마리를 잃게 됩니다. 제 경험상 이건 좀 다릅니다. 하이파이브의 후반부 전환은 인물들이 쌓아온 따뜻한 서사를 잔혹함으로 덮어버리는 느낌이었습니다.
특히 아쉬운 건 빌런 서사의 처리입니다. 춘화(진희경)는 분명 개성 있는 악역으로 구축되고 있었습니다. 아버지의 재생을 냉정하게 계산하면서도, 아버지가 선을 넘는 순간 막으려는 모순된 인물. 그런데 영춘이 본격 등장하면서 춘화는 급격히 도구적 인물로 축소되어 버립니다.
한국 영화 산업에서 히어로 장르물의 흥행과 서사 분석에 관한 연구는 꾸준히 이어지고 있습니다. 영화진흥위원회(KOFIC) 보고서에 따르면 국내 관객은 히어로물에서도 관계 서사와 정서적 몰입을 핵심 요소로 꼽는 경향이 강합니다(출처: 영화진흥위원회). 이런 점에서 하이파이브의 후반부가 관계 서사보다 스펙터클에 무게를 실은 선택은, 국내 관객의 감상 패턴과 다소 어긋날 수 있다고 봅니다.
한국형 히어로물의 가능성, 그리고 다음 발걸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이 영화가 한국형 히어로물이 나아갈 방향을 가장 구체적으로 보여준 작품이라고 생각합니다. 미장센(mise-en-scène)이라는 개념이 있습니다. 이는 화면 안에 배치된 모든 시각 요소, 즉 배우의 동선, 소품, 조명, 배경을 통해 의미를 만들어내는 연출 방식을 뜻합니다. 하이파이브는 이 미장센을 영리하게 씁니다. 요구르트 카를 중심으로 모이는 다섯 인물의 구도, 히어로명을 짓는 치킨집 장면에서 흘러나오는 마술이. 이 소품들과 공간들이 인물들 사이의 유대를 말없이 쌓아냅니다.
종민(오정세)이 딸 완서(이재인)의 친구들을 '일진'으로 오해하며 함께 구하러 달려가는 장면은 제가 이 영화에서 가장 좋아하는 부분입니다. 초능력도 모르고, 사정도 정확히 모르지만 그냥 딸 편이라서 달리는 아빠. 그 단순함이 오히려 더 웃기고 더 뭉클했습니다.
콘텐츠 분야 연구자들은 K-히어로 서사의 차별점으로 공동체적 정서와 일상성의 결합을 꼽습니다. 한국콘텐츠진흥원이 발간한 대중문화 트렌드 분석 자료에서도 감정적 공감 서사가 장르물의 흥행 지속력과 직결된다는 점이 확인됩니다(출처: 한국콘텐츠진흥원). 하이파이브는 그 가능성을 절반 이상 실현한 작품입니다.
하이파이브를 보고 나서 한동안 마술이 가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았습니다. 완벽하지 않아도 괜찮다, 혼자가 아니어도 된다는 감각. 그 감각이 남아서인지 극장을 나오는 발걸음이 조금 가벼웠습니다. 후반부의 장르 전환이 아쉬웠던 건 사실이지만, 그 아쉬움이 곧 이 영화의 전반부가 그만큼 좋았다는 반증이기도 합니다. 한국형 히어로물이 어떤 방향으로 가야 하는지 궁금하신 분이라면, 이 영화는 꼭 한 번 보시길 권합니다.
참고: https://namu.wiki/w/%ED%95%98%EC%9D%B4%ED%8C%8C%EC%9D%B4%EB%B8%8C(%EC%98%81%ED%99%9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