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젠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감독.
'거장'이라는 타이틀을 달고 세계인들에게 각인이 된 영화감독"봉준호 감독"의 영화 "미키 17"을 감상하였다.
괴물, 설국열차를 통해 세계인들에게 널리 한국영화를 알리게 되었고, 영화 "기생충"을 통해 거장의 반열에 오른 감독이다.
그의 작품 "미키 17"은 우리에게 친숙한 할리우드 배우 "로버트 패틴슨", "마크 러팔로", "나오미 아키에", "토니 콜렛", "스티븐 연"과
같은 배우와 함께 한국인 감독의 영화에 나온다는 사실이 당시 상당한 충격을 줬던 기억이 난다.
다소 어려운 주제이고 뻔한 영화일 것 같지만, 막상 감상을 하다 보면 영화 "미키 17"이 주는 메시지가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든다.

반복되는 죽음- 끝없이 인쇄되는 삶, 서늘한 자본의 우주를 유랑하는 비애의 서막
2054년, 기후 위기로 병들어버린 지구를 떠나 얼음으로 뒤덮인 낯선 행성 니플헤임으로 향하는 인류의 발걸음 속에는 결코 지워지지 않는 자본의 탐욕과 권력의 오만함이 짙게 배어 있다. 봉준호 감독이 새롭게 선보이는 이 경이로운 세계는 에드워드 애슈턴의 원작 소설이 지닌 흥미로운 모험극의 골격을 뼈대 삼아, 그 위에 현대 자본주의의 서늘한 부조리와 생명 경시라는 묵직한 살점을 덧붙여 완성되었다. 단지 사채업자의 잔혹한 추적과 빚의 굴레를 피하기 위해 스스로 '익스펜더블'이라는 가혹한 운명 속으로 뛰어든 한 남자의 이야기는, 우리에게 단순히 미래 우주 시대의 시각적 환상을 보여주는 것을 넘어선다. 그것은 기술의 발전이라는 미명 아래 철저하게 소모품으로 전락해 버린 인간 존재의 쓸쓸한 초상이며, 삶과 죽음의 경계마저 인쇄소의 잉크처럼 가볍게 복제되어 버리는 씁쓸한 디스토피아의 서막을 알리는 강렬하고도 슬픈 선언이다.
발버둥- 끝없이 반복되는 죽음의 굴레와 생존
사채업자 다리우스 블랭크의 무자비한 위협에서 벗어나고자 우주 개척단에 합류한 미키는 자신을 기다리는 운명의 잔혹함을 미처 알지 못했다. 서류조차 제대로 읽지 않은 대가로 그가 얻은 직업은, 죽음이 곧 새로운 노동의 시작이 되는 '익스펜더블'이었다. 얼음 행성 니플헤임의 혹독한 환경 속에서 그는 백신 개발을 위해 피를 토하며 죽어가고, 위험천만한 실험의 희생양이 되며 수없이 많은 죽음과 부활을 반복한다. 17번째 삶을 이어가던 미키는 팀원들과 나선 탐사에서 미지의 원주민인 크리퍼와 마주치고, 그 과정에서 동료들에게 버려진 채 깊은 크레바스 아래로 추락하고 만다. 절친했던 고아원 동기 티모조차 조롱 섞인 작별 인사만을 남기고 비정하게 떠나버린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 미키 17은 기적적으로 크리퍼들의 도움을 받아 생환한다.
하지만 지친 몸을 이끌고 돌아온 그의 침대에는 이미 18번째로 복제된 또 다른 자신이 누워 있었다. 하나의 존재가 두 개의 육신을 가지게 된 이 기이한 '멀티플' 상황은 단지 정체성의 혼란을 넘어 즉각적인 죽음의 위협으로 다가온다. 원칙적으로 복제 개체가 둘 이상 존재할 경우 태어난 순서를 불문하고 모두 폐기 처분된다는 무시무시한 규정 때문에, 성격마저 극단적으로 다른 미키 17과 미키 18은 서로를 견제하면서도 동시에 생존을 위해 기묘하고도 위태로운 동거를 시작한다. 연인 나샤까지 이들의 비밀스러운 이중생활에 동참하게 되면서 사태는 걷잡을 수 없이 꼬여가고, 탐사대의 독재자인 케네스 함장의 광기 어린 야욕이 크리퍼들과의 전면전으로 치닫는 가운데, 미키는 자신을 둘러싼 거대한 음모와 생존의 기로에서 가장 인간다운 선택이 무엇인지 끊임없이 시험받게 된다.
공감각적 전율- 서늘한 얼음 행성 한가운
어두운 상영관에 앉아 스크린을 마주하는 순간, 뼈를 에이는 듯한 니플헤임의 차가운 바람이 객석까지 고스란히 밀려오는 듯한 강렬한 착각에 사로잡혔다. 극장을 가득 채우는 서늘하고 건조한 음향 효과는 미키가 크레바스로 추락할 때 겪는 짙은 고독과 절망을 나의 호흡 속으로 직접 밀어 넣는 듯했다. 특히 생체 프린터에서 새로운 미키가 복제되어 나올 때 들려오는 기계음과 끈적한 유기물의 마찰음은 기이한 불쾌감과 동시에 형언할 수 없는 슬픔을 자아냈고, 이는 로버트 패틴슨의 경이로운 연기와 맞물려 영화의 몰입도를 극한으로 끌어올렸다.
스크린 속 패틴슨의 눈빛은 그저 두 명의 인물을 연기하는 것을 넘어선 온전한 질감의 차이를 보여주었다. 미키 17의 눈동자에는 수많은 죽음을 겪으며 축적된 체념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놓지 못한 이타심이 일렁이고 있었다면, 새롭게 태어난 미키 18의 시선에는 야생동물 같은 생존 본능과 날 선 분노가 번뜩였다. 이 두 자아가 하나의 화면 안에서 대립하고 엉키는 장면을 숨죽여 지켜보며, 나는 내 안의 어떤 파괴적인 욕망과 도덕적 갈등이 동시에 깨어나는 것을 온몸으로 느꼈다.
가장 시각적으로 압도당했던 순간은 크리퍼들이 기지를 에워싸고 거대한 원무를 그리며 움직이던 장면이다. 창백한 얼음 평원 위로 꿈틀거리는 미지의 생명체들이 뿜어내는 묘한 리듬감은 두려움을 넘어선 어떤 숭고함마저 자아냈고, 그들이 밤하늘을 향해 기괴하면서도 구슬픈 괴성을 내지르는 대규모 울룰레이션 장면에서는 온몸의 솜털이 곤두서는 찌릿한 전율을 경험했다. 얼어붙은 우주의 척박함 속에서도 피어나는 나샤와의 위태로운 체온, 지독하게 맛없는 배급 식량의 퍽퍽함, 그리고 옥시조폴의 몽환적인 연기마저 스크린 너머로 만져질 듯 생생하게 묘사된 탁월한 미장센 덕분에, 나는 두 시간이 넘는 러닝타임 내내 니플헤임의 차가운 공기를 마시며 미키와 함께 끝없는 죽음의 굴레를 걷는 듯한 완벽한 공간적 동화의 경험을 누릴 수 있었다.
이 작품이 지닌 진정한 미덕은 화려한 시각적 스펙터클 뒤에 웅크리고 있는 서늘하고 날카로운 시대적 성찰에 있다. 영화는 단순히 외계 행성에서의 모험을 그리는 것에 머물지 않고, 인간의 생명마저 철저히 비용과 효용의 가치로 환산해 버리는 천박한 자본주의의 도래를 통렬하게 비판한다. 익스펜더블이라는 제도는 가장 극단적인 형태의 비정규직 노동이자 생명 경시의 표본으로 작용한다. 거대한 3D 생체 프린터에서 끊임없이 찍혀 나오는 미키의 육체는 기술의 무한한 발전이 결코 인권의 진보나 윤리의 성숙과 비례하지 않음을 증명하는 참혹한 증거물이다.
또한, 케네스 마샬로 대변되는 권력층의 위선과 폭력성은 우리가 현재 딛고 서 있는 사회의 기득권이 가진 야만성과 놀랍도록 겹쳐 보인다. 크리퍼라는 원주민을 오직 정복과 배제의 대상으로만 바라보고, 가임기 여성의 몸을 종족 번식의 도구로 전락시키려 하는 그의 태도는 오만한 제국주의적 폭력의 연장선에 놓여 있다. 그러나 영화는 이러한 무거운 화두를 던지면서도 결코 얄팍한 도덕주의에 빠지지 않는다. 복제된 두 명의 미키가 살아남기 위해 서로의 목을 조르거나, 자신의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타인을 희생양 삼는 묘사들은 억압받는 약자들 내부에서도 언제든 발현될 수 있는 이기심과 폭력성을 건조하고도 서늘하게 드러낸다. 멀티플 현상을 대하는 종교계와 과학계의 피상적인 대립 역시, 진정한 생명의 고유성에는 무관심한 채 자신들의 정치적 헤게모니 싸움에만 몰두하는 현대 지성인들의 기만적인 위선을 날카롭게 찌른다. 이 끔찍한 디스토피아 속에서 결국 인류를 구원하는 것이 우월한 무력이나 압도적인 첨단 기술이 아니라, 가장 원초적인 스킨십의 기호와 피지배자들 간의 기이한 연대라는 점은 이 영화가 지닌 가장 전복적이고 시니컬한 매력이다.
타인의 삶을 억압하지 않고 자신의 행복을 온전히 누리기 위해 기꺼이 불멸의 생체 프린터를 폭파시켜 버린 미키의 마지막 선택은 화면이 암전 된 후에도 짙고 묵직한 여운을 남긴다. 부조리한 세계의 밑바닥에서 끝내 인간다움의 스위치를 눌러버린 이 처절하고도 아름다운 우주 생존기는, 일상이라는 이름의 소모적인 쳇바퀴를 묵묵히 굴리고 있는 우리 모두에게 스스로의 가치를 엄중하게 되묻게 만든다. 삶이 그저 반복되는 복사본처럼 무의미하게 느껴지는 어느 날, 이 차갑고도 뜨거운 걸작이 당신의 굳어진 마음에 깊은 파동을 일으킬 수 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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