솔직히 고백하자면, 저는 이 영화를 보기 전까지 기예르모 델 토로의 작품을 과대평가된 시각적 쾌감의 나열이라고 여겼습니다. 《프랑켄슈타인》(2025)을 보고 난 뒤 그 생각이 완전히 뒤집혔습니다. 창조자와 피조물이라는 200년 된 서사가 이렇게까지 현재적일 수 있다는 사실이 적잖이 당혹스러웠습니다.

빅터 프랑켄슈타인이라는 인간의 배경, 그리고 오만함의 기원
이 영화를 이해하려면 빅터 프랑켄슈타인이라는 인물의 형성 과정을 먼저 짚어야 합니다. 그는 단순히 '미친 과학자'가 아닙니다. 어머니를 잃은 상실감, 아버지에게 인정받지 못한 결핍, 그리고 "죽음을 정복하겠다"는 소년 시절의 선언이 켜켜이 쌓여 만들어진 인물입니다.
여기서 제가 주목한 것은 갈바니즘(Galvanism)이라는 개념입니다. 갈바니즘이란 전기 자극을 통해 근육이나 신체 조직을 활성화하는 현상으로, 18~19세기 유럽에서 '생명의 비밀'을 푸는 열쇠로 여겨졌습니다. 빅터가 에든버러 대학에서 선보인 실험은 바로 이 갈바니즘의 연장선이었고, 당대의 의학계는 이를 신성모독으로 규정했습니다. 제가 흥미롭게 봤던 부분이 바로 이 장면입니다. 크렘프 교수가 그를 내친 것은 단순한 종교적 반발이 아니라, 경계 밖으로 나가버린 지식에 대한 기존 권위의 거부반응이기도 했으니까요.
메리 셸리가 《프랑켄슈타인》 원작을 집필한 건 1818년입니다. 당시 유럽에서는 계몽주의 이후 과학적 합리주의가 급격히 팽창하면서 '인간은 자연을 지배할 수 있다'는 프로메테우스적 세계관이 지식인들 사이에 퍼져 있었습니다(출처: 영국문화원). 델 토로는 이 배경을 1857년 북극 탐험 시대로 옮겨와, 인간의 정복 욕망이 여전히 현재진행형임을 보여줍니다.
빅터의 서사에서 또 하나 눈여겨볼 요소는 미장센(Mise-en-scène)의 활용입니다. 미장센이란 화면 안에 배치되는 인물, 조명, 소품, 배경의 총체적 구성을 뜻하는 영화 용어인데, 델 토로는 빅터의 어두운 실험실과 얼음으로 뒤덮인 북극을 대비시키며 빅터의 내면적 공허함을 공간으로 시각화합니다. 제 경험상 이런 방식으로 인물의 심리를 공간에 녹여내는 감독은 드뭅니다.
크리처라는 존재를 해부하다, 불사성과 고독의 서사학
이 영화의 핵심은 크리처입니다. 저는 영화를 보는 내내 크리처 쪽에 더 마음이 기울었고, 그 이유를 한참 생각했습니다. 결론은 간단했습니다. 이 피조물은 죄 없이 태어났기 때문입니다.
영화 속 크리처가 가진 초재생능력은 단순한 장르적 설정이 아닙니다. 총에 맞아도, 폭발에 휘말려도, 물속에 가라앉아도 되살아나는 몸을 가졌다는 것은 죽음이라는 해방조차 허락되지 않는다는 의미입니다. 저는 이 설정을 처음 접했을 때 단순히 공포 요소로 읽었는데, 영화가 진행될수록 그것이 오히려 가장 잔혹한 형벌이라는 걸 깨달았습니다.
눈먼 노인과의 교류 장면은 이 영화에서 제가 가장 오래 곱씹은 부분입니다. 크리처는 그곳에서 언어를 배우고, 사랑을 배우고, 자신이 '무언가'라는 감각을 처음으로 얻습니다. 심리학에서는 이를 애착 형성(Attachment Formation)이라고 부릅니다. 애착 형성이란 특정 대상과의 반복적 상호작용을 통해 정서적 유대를 구축하는 과정으로, 생후 초기의 인간에게 자아 개념의 토대가 됩니다(출처: 미국심리학회). 갓 태어난 크리처에게 노인은 사실상 최초의 애착 대상이었던 셈입니다.
크리처를 분석할 때 빠질 수 없는 세 가지 구조적 지점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 언어 획득: 빅터에게서 이름 하나만 배웠던 크리처가 노인과의 교류를 통해 유창한 문장 구사 능력을 얻습니다. 이는 단순한 성장이 아니라 정체성의 발화입니다.
- 공감 능력의 역설: 죽은 시체들의 육체로 조립된 존재가 살아 있는 인간보다 더 깊이 타인의 고통에 반응합니다.
- 불사와 고독의 등치: 죽지 못하는 몸이 곧 영원한 소외를 의미하며, 이 설정이 크리처의 비극성을 원작 이상으로 증폭시킵니다.
제 경험상 이처럼 피조물의 서사를 창조자와 동등하거나 더 깊게 다루는 각색은 흔하지 않습니다. 원작 소설이 크리처에게 충분한 목소리를 줬음에도, 대부분의 영화적 해석은 빅터에게 무게중심을 두었습니다. 델 토로는 그 균형을 완전히 다르게 설정했고, 저는 그 선택이 이 영화의 가장 큰 미덕이라고 봅니다.
결말이 말하는 것, 구원의 조건과 서사적 완성도의 전망
빅터가 죽기 직전 크리처에게 "아들"이라고 부르며 사과하는 장면은 이 영화 전체의 무게가 집중되는 순간입니다. 제가 직접 보면서 느꼈던 감각은 단순한 감동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씁쓸함이 더 컸습니다. 왜냐하면 그 인정은 너무 늦게 왔기 때문입니다.
캐릭터 아크(Character Arc)라는 서사 개념이 있습니다. 캐릭터 아크란 이야기가 진행되면서 인물의 내면적 변화나 성장이 이루어지는 궤적을 의미합니다. 빅터의 아크는 '오만한 창조자에서 후회하는 아버지로'의 이동이고, 크리처의 아크는 '버려진 피조물에서 용서할 수 있는 존재로'의 이동입니다. 이 두 궤적이 북극이라는 극단의 공간에서 교차하는 구조는 서사적으로 꽤 정교합니다.
다만 저도 아쉬운 부분을 솔직히 말씀드리면, 엘리자베스와 윌리엄의 퇴장 방식이 조금 아쉬웠습니다. 두 인물 모두 우발적 사고와 오해가 겹쳐 사망하는데, 이것이 비극의 무게를 더하는 측면도 있지만 동시에 서사를 진행시키기 위한 장치처럼 읽히기도 했습니다. 하인리히 하를란더의 퇴장 역시 비슷합니다. 조력자로 등장해 실험을 견인하다가 갑작스럽게 추락사하는 흐름은 다소 작위적으로 느껴졌습니다. 이런 구성을 두고 일부에서는 "주변 인물이 소모적으로 쓰였다"라고 보는 시각도 있는데, 저도 그 의견에 어느 정도 동의합니다.
그럼에도 마지막 문장, "그리하여 마음은 부서질 것이나, 부서진 채로 살아가리라"는 바이런 경의 시구는 영화 전체의 정서를 완벽하게 압축합니다. 부서진 존재가 부서진 채로 살아간다는 것, 그것이 이 영화가 말하는 구원의 조건입니다.
이 영화를 보고 나서 메리 셸리의 원작 소설을 다시 읽어보시길 권합니다. 델 토로가 어디를 유지하고 어디를 바꿨는지를 비교하며 읽으면, 각색이 단순한 재해석이 아니라 원작에 대한 하나의 응답이라는 걸 더 선명하게 느낄 수 있습니다. 창조자에게 이름을 받지 못한 피조물이 결국 창조자를 아버지라고 부르는 순간, 저는 이 영화가 오래 남을 것이라고 확신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