솔직히 저는 이 영화를 보기 전까지, 액션 장르에서 이념과 권력 구조를 이렇게 정면으로 해부하는 작품이 나올 거라고 기대하지 않았습니다. 일반적으로 이런 류의 영화는 부녀 관계의 감동에 집중한다고 알려져 있지만, 실제로 보고 나니 그건 절반짜리 독해였습니다. 극좌와 극우라는 두 이념의 끝자락에서 인간이 어떻게 소모품이 되는지, 그 구조를 냉정하게 보여주는 영화였습니다.

위선적 권력 시스템이 개인을 소비하는 방식
록조라는 인물을 처음 봤을 때, 저는 그저 전형적인 악당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영화가 진행될수록 이 사람은 악당이기 이전에 시스템의 피해자이기도 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가 목숨을 걸고 입성하려는 '크리스마스 모험가 클럽'은 사실상 순혈주의(ethnonationalism)를 기반으로 한 비밀 결사입니다. 여기서 순혈주의란 혈통과 인종의 순수성을 집단의 유지 조건으로 내세우는 이데올로기를 말하며, 현대 극우 단체들의 핵심 논리로 자주 등장합니다.
녹조는 평생 그 이데올로기를 수호하는 척 살았지만, 사실 그의 몸에는 자신이 경멸하는 '혼혈 관계'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습니다. 그는 과거를 지우기 위해 친딸을 처분하려 했고, 그토록 원하던 클럽 멤버십을 손에 쥔 순간 환기구를 통해 주입된 독가스에 살해당합니다. 쓸모가 다한 인간을 냉정하게 제거하는 이 장면은, 제가 직접 겪었던 어떤 조직 경험과 겹쳐 보였습니다. 겉으로는 가치와 이념을 내세우지만 실제로는 이익과 효용만이 생존 기준이 되는 집단의 냉혹한 논리 말입니다.
이 영화에서 록조가 최후에 처한 상황을 토사구팽(兎死狗烹)이라는 개념으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토사구팽이란 필요할 때는 이용하고, 쓸모가 없어지면 가차 없이 버리는 권력관계의 전형적인 패턴입니다. 흥미롭게도 사회심리학 연구에 따르면, 인간이 시스템 내에서 도구적 가치를 잃었을 때 조직이 개인을 대하는 방식은 국가나 이념을 불문하고 매우 유사한 구조를 보입니다(출처: 한국심리학회).
이 장면에서 영화가 비판하는 핵심 포인트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 극우 비밀 결사는 이념이 아닌 이익과 순혈 논리로 작동하는 권력 카르텔임
- 록조는 그 시스템에 복무한 도구였을 뿐, 진정한 구성원이 된 적이 없음
- 클럽 멤버들은 록조의 단속 작전이 자신들의 치킨 공장 가동을 멈추게 하자 손실을 따지는 현실적 계산을 먼저 했음
- 이념적 순수성이라는 명분은 결국 경제적 이해관계를 위한 포장지에 불과함
선택된 가족이 혈연보다 강한 이유
일반적으로 가족 영화는 혈연의 회복을 감동의 원천으로 삼는다고 알려져 있지만, 저는 이 영화가 그 공식을 완전히 뒤집는다는 점에서 훨씬 더 설득력 있다고 느꼈습니다. 윌라는 자신의 생물학적 아버지가 극우 권력자 록조라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그리고 그 충격이 가시기도 전에,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밥이 자신을 지키기 위해 16년 동안 모든 것을 걸었다는 사실도 알게 됩니다.
제가 삶에서 가장 어두운 시기를 지날 때, 저를 지켜준 건 피를 나눈 가족이 아니라 묵묵히 곁에 있어준 사람들이었습니다. 그 경험이 있기에 윌라가 총을 내려놓는 장면이 단순한 영화적 클리셰(cliché)로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여기서 클리셰란 지나치게 반복 사용되어 신선함을 잃은 표현이나 상황을 의미하는데, 이 장면은 오히려 정반대였습니다. 암구호를 외치며 서로를 확인하는 그 과정이, 이념보다 인간이 먼저라는 메시지를 너무도 자연스럽게 전달했습니다.
사회학에서는 이처럼 혈연이 아닌 선택과 유대로 형성된 가족 구조를 선택적 친족관계(fictive kinship)라고 부릅니다. 선택적 친족관계란 생물학적 연결 없이도 상호 헌신과 정서적 유대를 바탕으로 형성되는 가족적 결속을 의미하며, 현대 가족 연구에서 점점 더 중요하게 다뤄지고 있습니다. 실제로 국내 가족 형태의 다양화 추세를 보면, 1인 가구와 비혈연 공동체 가구가 지속적으로 증가하는 추세입니다(출처: 통계청).
밥이 마약 중독이라는 편집증적인 상태에 빠져 있으면서도 윌라를 놓지 못한 것, 그리고 윌라가 그 못난 아버지의 실체를 알면서도 결국 "아빠"라고 부른 것, 이 두 장면은 제 경험상 선택된 가족이 왜 때로는 혈연보다 강한 결속을 만들어내는지를 보여주는 가장 직관적인 영화적 표현이었습니다.
이념의 대물림, 해방인가 반복인가
마지막 장면에서 저는 솔직히 두 가지 감정이 동시에 들었습니다. 비 오는 날 오클랜드 시위 현장으로 걸어가는 윌라의 뒷모습이 희망적으로 보이기도 했고, 동시에 불안하게 느껴지기도 했습니다.
혁명적 사회화(revolutionary socialization)라는 개념이 있습니다. 이는 특정 정치 이념이나 저항 문화가 세대를 거쳐 의식적 혹은 무의식적으로 전달되는 과정을 의미합니다. 윌라는 자신의 의지로 시위 현장에 나가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선택이 프렌치 75 출신 아버지 밥, 밀고자였던 어머니 퍼피디아, 혁명 동지 디앤드라의 유산에서 완전히 자유로운지는 영화가 명확한 답을 주지 않습니다.
저는 이 부분이 영화에서 가장 정직한 지점이라고 생각합니다. 부모 세대의 실수와 이념을 완전히 지우고 새로 시작하는 것이 가능한지, 저 자신도 오랫동안 그 질문을 붙들고 살았기 때문입니다. 밥이 뒤늦게 스마트폰을 배우며 세상에 한 발짝 나오는 장면과, 딸이 다시 거리로 나가는 장면을 나란히 놓은 것은 의도적인 대비 구조로 보입니다. 한 사람은 현재로 걸어 들어오고, 다른 사람은 과거의 언어로 미래를 향해 걷는다는 인상이었습니다.
영화 연구자들은 이런 서사 구조를 열린 결말(open ending)이라 부르며, 관객에게 도덕적 판단을 위임하는 방식으로 평가합니다. 쉽게 말해 영화가 답을 주는 대신 질문을 남기는 방식입니다. 제가 이 영화에서 가장 오래 남은 것도 바로 이 질문이었습니다. 과거의 유산을 이어받는 것과 반복하는 것은 어떻게 다른가.
이 영화가 단순한 액션물이 아니라는 것은 보고 나서 한참이 지나도 이 질문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다는 사실에서 확인됩니다. 위선적인 시스템, 혈연을 뛰어넘는 유대, 그리고 이념이 남긴 상처를 다음 세대가 어떻게 감당해야 하는지를 이 영화는 끝까지 정직하게 묻습니다. 답이 깔끔하게 나오지 않는 것이 오히려 이 작품의 진짜 가치라고 생각합니다. 아직 이 영화를 보지 않은 분이라면, 액션보다 그 질문을 받아들일 준비를 하고 극장에 들어가시길 권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