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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리뷰 "아이 캔 스피크" (침묵의 언어, 연대, 역사 증언)

by 짙은눈썹 2026. 5. 9.

민원만 넣는 고집스러운 할머니가 사실은 수십 년 동안 아무에게도 말 못 했던 비밀을 품고 있었다면 어떤 기분이 드십니까? 저는 이 영화를 처음 봤을 때 전반부의 유쾌한 웃음이 갑자기 목에 걸려 내려가지 않는 경험을 했습니다. 코미디인 줄 알고 앉았다가 중반 이후 눈물을 참느라 아랫입술을 깨물었던 기억이 아직도 선명합니다.

영화 "아이 캔 스피크" 포스터

침묵의 언어, 영어를 배우려 했던 진짜 이유

영화 《아이 캔 스피크》에서 옥분 할머니가 영어를 배우려 했던 첫 번째 이유는 미국에 있는 동생과의 재회였습니다. 하지만 그 소망은 영화 중반에 조용히 무너집니다. 동생은 전화기 너머에서 "기억나지도 않고 만나기도 싫다"며 끊어버립니다. 직접 겪어보니, 이 장면에서 할머니가 떨구는 침묵이 어떤 대사보다 무겁게 느껴졌습니다.

옥분이 진짜로 영어를 익혀야 했던 이유는 친구 정심의 마지막 소망 때문이었습니다. 정심은 치매(認知症, dementia)가 찾아오기 전에, 미국 하원 청문회에서 일본군 위안부 피해를 직접 증언하고 싶었습니다. 여기서 치매란 뇌 기능이 점진적으로 손상되어 기억력과 언어 능력이 저하되는 신경계 질환을 말합니다. 정심이 그 자리에 서지 못하게 되자, 옥분은 친구 대신 자신이 말하겠다고 결심합니다. 언어가 단순한 의사소통 수단이 아니라 역사적 증언(歷史的 證言, historical testimony)의 도구가 되는 순간이었습니다. 여기서 역사적 증언이란 당사자가 직접 겪은 사실을 공식 석상에서 밝히는 행위로, 법적·외교적 효력을 가질 수 있습니다.

저는 이 설정이 단순한 드라마 장치라고 보지 않습니다. 실제로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이 세상을 떠나는 속도를 생각하면, 영화가 던지는 질문은 픽션이 아니라 현재진행형입니다. 여성가족부에 따르면 정부에 등록된 위안부 피해자 중 생존자 수는 해마다 줄어들고 있으며, 2025년 기준 생존 등록 피해자는 한 자릿수에 불과합니다(출처: 여성가족부).

연대가 만들어낸 목소리의 크기

솔직히 이건 예상 밖이었습니다. 저는 처음에 민재라는 캐릭터를 전형적인 '원칙주의 공무원'으로만 읽었습니다. 규정 뒤에 숨어 민원을 처리하는 사람. 그런데 영화가 진행될수록 민재는 단순한 조력자가 아니라, 우리 사회의 행정 시스템이 한 개인의 목소리를 어떻게 눌러왔는지를 반성하는 캐릭터로 변해갔습니다.

영화에서 민재가 내부적으로 추진한 방식은 행정소송(行政訴訟, administrative litigation)의 역이용이었습니다. 행정소송이란 행정 기관의 처분이 위법하다고 주장하며 법원에 시정을 구하는 소송입니다. 민재는 구청이 재개발 중지 명령을 내린 뒤 건설사가 이에 불복해 소송을 제기하면 구청이 일부러 지는 방식으로 시장 상인들의 문제를 우회하려 했습니다. 이 장면에서 제가 느낀 건, 절차가 때로는 사람을 보호하는 게 아니라 특정 이익을 감추는 포장지가 된다는 씁쓸함이었습니다.

민재가 청문회장에 난입하는 장면은 영화적 과장임이 분명합니다. 제 경험상 이런 장면은 극적 카타르시스를 위한 장치로 볼 수 있지만, 동시에 비판도 가능합니다. 현실의 위안부 피해 증언은 수십 년간 고독하고 지난한 싸움이었기 때문에, 영화가 그 과정을 지나치게 낭만화한다는 경계의 시각도 충분히 유효합니다. 다만 저는 이 장면을 '한 개인이 더 이상 혼자가 아니라는 선언'으로 읽는 편입니다. HR121(하원 결의안 121호)이란 2007년 미국 하원에서 일본 정부에 위안부 문제에 대한 공식 사과를 촉구하는 결의안으로, 실제로 통과된 역사적 문서입니다.

연대의 힘이 어떻게 개인의 목소리를 증폭시키는지, 이 영화는 시장 상인들과 구청 직원들의 반응을 통해서도 보여줍니다. 옥분의 과거가 알려진 뒤 진주댁이 내뱉는 대사가 특히 기억에 남습니다. "그런 사실을 왜 말해주지 않았느냐, 말했으면 내가 뭐라도 도왔을 것 아니냐." 이것은 단순한 위로가 아니라, 피해자가 수십 년 동안 왜 침묵할 수밖에 없었는지를 역으로 드러내는 장면입니다.

역사 증언이 영화가 될 때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

옥분의 청문회 연설에서 가장 강렬했던 문장은 "Is that so hard?"였습니다. 긴 문장도, 복잡한 논리도 아닙니다. 제가 이 대사를 듣고 느낀 건, 진실을 요구하는 언어는 화려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오히려 짧을수록 더 날카롭게 박혔습니다.

영화가 다루는 반인도적 범죄(crimes against humanity)는 국제법적 개념으로, 민간인을 대상으로 광범위하고 체계적으로 자행된 살인·박해·강제 성범죄 등을 포괄하는 범주입니다. 여기서 반인도적 범죄란 전쟁 상황과 무관하게 처벌 대상이 되는 국제형 사법상 가장 중한 범죄 유형 중 하나입니다. 옥분이 흉터가 가득한 배를 드러내는 장면은 이 개념을 어떤 문서보다 강력하게 증명하는 행위였습니다.

한국영화산업에서 이런 역사적 소재를 다루는 방식은 계속 진화해 왔습니다. 서사적 완성도(敍事的 完成度, narrative completeness)란 이야기가 주제와 캐릭터 동기, 결말을 얼마나 유기적으로 연결하는지를 평가하는 개념입니다. 이 기준에서 《아이 캔 스피크》는 전반부의 코미디 톤과 후반부의 숭고한 무게를 하나의 서사 안에 담아내는 데 성공했다고 봅니다.

이 영화에서 주목할 만한 장면 포인트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 도입부의 황산 살포 장면: 영화 전체의 긴장감을 예고하는 복선이자, 시장 상인들이 처한 현실적 위협을 압축한 장면
  • 구청 도서관의 '한국의 철새' 책 배치: 구청장의 기회주의적 행태를 날카롭게 꼬집는 풍자적 소품
  • 청문회에서의 흉터 공개: 언어 이전에 몸 자체가 증거가 된다는 것을 보여주는, 영화 최고의 장면
  • 마지막 공항 "Of course": 피해자라는 이름 뒤에 숨겨졌던 한 인간의 존엄이 회복됐음을 알리는 결말

유네스코(UNESCO)는 구술 역사(oral history) 보존을 중요한 문화유산 보호 활동으로 규정하고 있으며, 생존 증인의 증언 기록을 위한 국제 협력을 권고하고 있습니다(출처: UNESCO).

《아이 캔 스피크》가 보여주는 것은 단순히 한 할머니의 용기가 아닙니다. 제 경험상 이 영화는 볼 때마다 다르게 읽힙니다. 처음에는 코미디로, 두 번째는 역사 드라마로, 세 번째는 우리 사회가 피해자에게 어떤 침묵을 강요해 왔는지를 보여주는 거울로. 아직 보지 않으셨다면, 되도록 혼자보다는 누군가와 함께 보시길 권합니다. 영화가 끝난 뒤 나누는 대화 자체가 연대의 시작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참고: https://namu.wiki/w/%EC%95%84% EC% 9D% B4%20% EC% BA%94%20% EC% 8A% A4% ED%94% BC% ED%81% A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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